왕을 원한 마음, 민주주의를 잃은 감정

– 불안이 만든 대리 리더십과 감정의 외주화에 대하여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서 싸우게 하십시오.” [사무엘상 8:6 ]

이스라엘 백성이 왕을 요구하던 그 날의 말은, 멀고 낯선 고대의 문장이 아닙니다. 어쩌면 지금도, 아주 많은 이들의 마음속에서 되뇌이고 있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두려움 앞에서 누군가가 대신 싸워주길 바라는 마음. 책임을 지기보다 지시받는 쪽을 택하고 싶은 감정. 그 모든 감정의 단면이 이 한 문장에 스며 있습니다.

한 무리의 군중이 흐릿하게 모여 있고, 그 앞에 선 실루엣 하나 위로 왕관이 떠 있다. 모두가 침묵한 채 그 인물을 바라보는 장면은, 감정의 위임과 권위에의 복종을 상징한다.

그 감정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반복됩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생일에 맞춰 워싱턴 D.C.에서 거행된 군 열병식은 강한 리더십의 상징처럼 연출되었고, 동시에 미 전역 2천여 곳에서 ‘No Kings’라는 구호를 외치는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이 시위는 그저 정책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권위주의에 대한 근원적 거부였습니다. “우리는 왕이 필요하지 않다”는 선언 말입니다.

미국 'No Kings' 시위 현장 이미지를 가상으로 만들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No Kings' 피켓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정치가 감정을 연료로 삼을 때

경제적 불안정, 사회적 갈등, 외부 위협—이런 조건은 언제나 시민에게 불안을 안깁니다. 그리고 그 불안은 강한 리더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고 싶은 유혹으로 이어집니다. 전쟁이나 위기 상황 속에서 우리는 종종 결집하고, 논리를 내려놓고, ‘힘’의 상징에 기대게 됩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정치 지도자는 감정의 연출자가 됩니다. 두려움, 분노, 피해의식, 자존심이라는 집단 감정은 도구처럼 사용되고, 이 감정들은 타인을 향한 적개심과 편가르기로 증폭됩니다. 특정 정책이나 리더십이 실패했을 때, 그 책임은 외부의 적, 또는 사회 내부의 약자에게 전가됩니다. 누군가를 희생양 삼는 정치가 반복되는 이유입니다.

사무엘상 8장에서 하나님은 경고하십니다. 왕은 아들들을 전쟁터로 보내고, 딸들을 부엌으로 끌어들일 것이다. 포도원과 밭은 빼앗기고, 수확은 세금으로 징수될 것이다. 젊은이들은 종처럼 부려질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권력의 남용이 아니라, 감정의 외주화가 빚는 정치적 재앙입니다.


감정의 외주화, 민주주의의 퇴화

“내가 너희를 안전하게 해주겠다.”

이 말은 언제나 달콤합니다. 하지만 그 말 뒤에는 우리가 감정을 더 이상 스스로 감당하지 않겠다는, 조용한 포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분노하고 책임지고, 실패를 감내하고 싶지 않을 때, 누군가 대신해주길 바라는 그 순간—민주주의는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사라집니다.

트럼프 정부는 이민자 단속, 분리 수용, 일방적 통치라는 형태로 그 권위를 과시했고, 많은 시민들은 그 아래서 안도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 안도감은 자유의 감각을 잃는 대가였습니다.


민주주의는 감정의 용기에서 시작된다

수많은 사람이 등을 돌리고 서 있는 광장 한가운데, 단 한 명만이 앞으로 나아가며 마이크를 잡는다. 그 발밑에는 'Think. Decide. Stand.'라는 문구가 흐릿하게 새겨져 있다.

민주주의는 단지 제도가 아닙니다. 감정의 성숙에서 시작되는 체제입니다. 감정을 타인에게 위임하지 않고, 스스로 감당하겠다는 의지. 두려움 앞에서 결정을 미루지 않고, 목소리를 내는 연습. 때로는 고립될지라도, 옳다고 믿는 것을 지켜내는 태도.

정치지도자가 감정을 이용하려 할 때, 우리는 그 감정을 스스로 다루며 판단할 줄 아는 내면의 근력을 갖춰야 합니다. 불확실성 속에서도 연대하고, 실패를 공동체와 나누는 용기. 그게 민주주의의 근육입니다.


조용한 여운, 열린 질문

하나님은 왜 그날, 부르짖는 백성에게 응답하지 않으셨을까요? 어쩌면 그 부르짖음은 진심이 아니라, 감정조차 위탁한 자의 마지막 외침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지금, 우리는 얼마나 많은 왕을 뽑고 있나요? 그들이 정말 우리의 대표인가요, 아니면 우리의 감정을 대신 살아주는 사람들인가요?

당신은 오늘, 누구의 감정으로 살아가고 있나요?

댓글로 당신의 감정 여정을 나눠주세요.
이 글이 마음에 머물었다면, 구독으로 함께 감정의 근력을 키워나가요.

댓글 남기기

Garden of Thought

사유정원에 오신 여러분 환영합니다.

사유정원은 감정의 리듬을 되찾고, 존재의 중심으로 되돌아가려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입니다. 나는 감정을 분석하거나 통제하려 들기보다, 그 감정이 건네는 말을 오래 듣고자 합니다. 이 정원에서 당신도 당신의 감정을 되새김질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Let’s connect